서초구 아트스페이스엑스서 개인전 개최
청계산 채집 식생·소리로 전시 공간 채워
공항, 지하철 등 도시 속 ‘이식된 자연’ 탐구
국제 미술상 수상 작가… 13일까지 전시
김유정 작가의 도시 정원이 이번엔 청계산 자락에 있는 갤러리로 옮겨 왔다. 오는 13일까지 서울 서초구 아트스페이스엑스에서 진행 중인 김유정 개인전 ‘옮겨진 자리마다’(Rooted in Transit)는 전시 공간의 장소성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청계산에서 직접 채집한 식생과 새소리, 정원을 가꾸던 사물들로 구축한 오브제를 그동안 작가가 이어온 프레스코, 틸란드시아 식물 설치, 조명 작업 등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배치했다. 갤러리 지하 공간부터 지상 1층과 2층, 옥상까지 이어지는 김유정의 식물원을 구축했다.
프레스코 회화 ‘들여온 계절’ 작은 도시, 건축, 공항과 지하철, 실내 조경과 공공녹지 등에 인간에 의해 이식되고 관리된 식물을 담았다. 인천국제공항의 실내 조경, 일명 ‘송현아’(현대프리미엄아울렛 송도점), 인천 구도심 속 근대건축물과 얽히고설킨 식물들을 통해 도시 안으로 이식된 자연과 이동하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생태학적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전시장 지하를 가득 채운 틸란드시아는 흙 없이 공중에서 살아가는 식물이다. 피아노와 벽면, 전시장 바닥에 난 금까지 덮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항은 장소이면서도 비장소인 공간이다. 그곳의 식물은 목적지가 아니라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식물을 옮기고, 물을 주고, 마른 잎을 떼어내며 그 풍경을 유지했을 것이다. 종각역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공간에서 나는 식물보다 이름 모를 관리자의 손을 먼저 상상하게 되었다. (중략)
이번 전시 ‘옮겨진 자리마다’는 이러한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청계산 자락에 자리한 아트스페이스엑스와 그 주변을 오가며 식생과 소리를 채집하고, 묘목을 묶었던 끈과 화분, 호스, 플라스틱 망, 버려진 병 등 조경의 흔적들을 수집했다. 인간이 자연을 돌보기 위해 사용했던 사물들은 본래의 기능을 잃은 뒤에도 또 다른 시간을 품고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다시 연결하며 새로운 관계를 상상했다. (중략)
이 전시가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도시 속 자연과 그 곁의 손길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김유정 작가는 인천아트플랫폼, 소마미술관, KH필룩스조명박물관, 아트센터 예술의시간, 금호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대만 주밍미술관 국제전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미술관 기획전에 참여했다. 인천아트플랫폼과 OCI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 ‘소버린 아시아 미술상’(The Sovereign Asian Art Prize)의 ‘보그 홍콩 여성상’(Vogue Women’s Prize·특별상)을 수상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다수 작품이 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2026-09-01
미공개부터 신작까지 함께 기억하다
살았던 곳·사라질 장소 탁본으로 남겨
젤라틴 티슈·수제 종이로 만든 드로잉
가족 관련된 사물 담아 만든 재킷 공개
자신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끌어올린 집과 건축, 신체와 공간의 관계를 독창적인 언어로 표현해 온 작가 서도호의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관람객들을 만난다.
투명한 천을 주재료로 사용해 실제 건축 공간을 재현해 온 서도호 작가의 작업 방식은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뉴욕 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모리 미술관 등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여 왔다.
지난해에는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Walk the House’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진행했는데, 한국에서 준비한 이번 개인전은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과 신작들이 더해지며 작가의 예술 세계를 더욱 폭넓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띤다. 회고전의 성격보다는 서도호 작가의 초기 작품들, 그를 토대로 확장된 예술 세계와 사유, 작업의 흐름 등을 자연스럽게 마주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라는 것이 큰 매력이다.
발가벗은 기분이라고 했지만, 서도호 작가의 초기 시절 작업들은 그가 30년간 활동할 수 있었던 작품들의 씨앗이기도 했다. 어떻게 발아될 지 몰랐던 것들, 그때부터 지금까지 천착해 온 것들 등 작가가 이번 전시의 시작으로서 중요성을 언급했던 작업들이 ‘시드뱅크’에 모여있다.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과 몸, 옷, 이동, 공간 등 작가의 관심이 여러 형태로 드러나 있는 이곳의 작품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예술 형성과 전개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전시실의 입구에는 ‘작은문, 서울 성북구 성북동 260-10’작품이 옥색빛의 한옥 대문을 통해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한다. 이 전시실에서는 서도호 작가의 200여점의 드로잉들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특히 젤라틴 티슈와 수제 종이를 활용해 실을 섬유 속에 매립하는 독창적인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업은 작품이 가진 특이한 물성과 느낌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서도호 작가 특유의 유머와 감각이 고스란히 다가온다.
4전시실과 5전시실에서는 작가의 대표작과 최근작을 만날 수 있는데 확실한 압도감을 준다. 2012년에 시작된 서도호의 대표작 ‘러빙/러빙’ 연작은 작가가 살다가 떠나왔거나 곧 사라질 장소를 탁본한 것이다. 집안 곳곳에 닥지를 밀착시켜 흑연과 색연필로 오랜 시간을 문질러 남긴 흔적으로 집의 모양을 그대로 만들어 내는데, 나의 몸과 장소가 함께 쌓아오고 지나온 시간을 기록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테이트모던 전시에서도 선보인 최근 작업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은 작가가 그동안 살아온 여러 집의 문손잡이와 콘센트, 스위치 등 건축의 작은 요소들을 한 공간에 모은 것이다. 작가는 자주 만지는 물건에는 그 사람의 기운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내 삶의 루틴은 어쩌면 이 작은 것들에서 시작된다는 서도호 작가의 말처럼, 그간의 시간과 장소가 교차하는 하나의 건축적 자서전으로 보여지는 곳이다.
복도 등 공용공간 곳곳에서도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둥지/들’의 경우 여러 도시에 거주했던 집의 복도와 문, 방과 같은 공간을 하나의 연속된 건축으로 재구성했다. 이 작품 안을 지나가 보면 집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고 재구성되는 관계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MMCA 스튜디오 공간도 놓쳐서는 안 될 곳이다. 이곳에서는 옷으로 된 작품들이 많은데, 이는 오랫동안 작가가 관심을 가져온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몸을 감싸는 제일 작고 은밀한 이동공간인 옷이 확장된 개념이 건축이라는 서도호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랑의 기억(레코드 협업)’은 가족의 옷에서 떼어낸 주머니를 달고 그 안에 가족과 관련된 사물을 담은 작품이다. 가족이지만 각자가 가진 독립성 사이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재킷을 입고 눈물을 훔쳤던 서도호 작가의 깊은 마음까지도 전달된다.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서도호 작가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내년 2월 9일까지 이어진다.
2026-08-31
발라드·록·전통음악 넘나들며 색다른 매력
‘한’ 깃든 아리랑 신명나는 ‘흥’으로 풀어내
아이·부모·조부모 함께 웃고 박수 “얼쑤”
개항부터 해양·농경문화까지 한 무대에
흔히 우리 전통음악 국악(國樂)은 느리고 지루하며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다. 때로는 시끄럽기만 해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즐기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지난 29일 인천 서해구 ‘청라블루노바홀’에서 인천 시민과 만난 ‘연희판놀음 인천아리랑 연가’ 공연 현장은 이러한 그릇된 고정관념을 깨트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기회였다. 어린아이부터 부모, 할머니·할아버지까지 한데 어우러진 객석에서는 공연 내내 박수와 환호, 탄성이 이어졌다.
공연에는 ‘연가(宴歌)’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부르며 즐긴다는 뜻이다. 이별과 그리움, 한의 감정이 스민 ‘아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날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이 재해석해 무대에 선보인 한국의 노래 ‘아리랑’은 세대를 아우르는 공통된 감정을 담아내는 ‘플랫폼’으로서 가능성을 보여준 자리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쑤 아라리요. 인천 제물포 살기 좋아도, 왜인 위세로 못 살겠네”(인천아리랑 가사)
특히 이날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 ‘인천아리랑’은 인상적이었다. 인천아리랑은 이날 발라드, 록, 전통 버전 등으로 선보였다. 무엇보다 즐겁고 신나게, 또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무대에 올려졌다는 점이 특히 중요했다.
이날 블루노바홀에는 어린아이와 부모, 그리고 할머니·할아버지 등 3대가 함께 온 듯한 가족 단위 관객이 특히 많았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과연 하나의 공연으로 모두 즐거워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기우였다. 공연 시작 전 추임새를 따라 배우던 객석의 어색한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공연이 이어지며 모두 함께 박수와 환호, 감탄사를 연발하며 다 함께 웃고 즐기는 잔칫날이 따로 없었다.
“우리 지연이가 인천 아리랑을 잘 따라하네, 배우기 쉬웠지?”(아빠) // “네, 금방 따라할 수 있었어요.”(딸)
‘아버지가 딸에게 친절하게 들려주는 국악이야기’라는 공연 형식도 주효했다. 미취학 아동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를 낮춘 ‘렉쳐 퍼포먼스’로 정의해도 무방할 듯 하다.
아빠와 딸은 인천아리랑과 인천의 개항, 우리 전통예술이 가진 다양한 장르 형식을 설명했다. 객석의 관객이 그저 눈과 귀만 열어놓으면 단숨에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공연에서는 리드미컬한 ‘설장구 시나위’, 5개의 북을 치는 신기에 가까운 퍼포먼스인 ‘오북춤’, 버나·상모돌리기 등 비보이 배틀을 보는 것 보다 더 다이내믹한 ‘연희판놀음’ 등을 선보였다. 작품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때로는 웃음바다가 됐다. 뱃일과 농사에 부르던 노동 음악을 선보이며 인천의 해양문화와 농경문화를 하나의 공연으로 담아냈다는 점도 특별했다.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의 ‘연희판놀음 인천아리랑’은 지역 콘텐츠를 발굴·지원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2026 지역대표 예술단체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서광일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대표는 “관객에게 필요한 눈높이는 낮게, 공연의 감동이 가슴에 도달하는 지점은 깊게 의도한 작품”이라며 “더 많은 인천시민들이 인천의 이야기와 전통예술을 즐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오는 9월 4일 송도 트라이보울에서 또 한 번 펼쳐진다.
2026-08-30
前 한국지엠 부사장, 역사 굴곡 체험
투자협상 과정 남은 노트 책에 담아
2년 뒤 ‘존속 만료’… 미래세대 질문
■ GM은 왜 한국을 떠나지 않는가┃최종 지음. 다인아트 펴냄. 270쪽. 2만원
“2018년 봄, 군산공장 폐쇄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 끝에 한국지엠 노사와 대주주인 지엠 본사, 산업은행은 ‘10년의 존속’을 약속했다. …(중략)…그러나 이제 불과 2년 뒤면 그 ‘10년의 약속’이 만료된다.”(책 프롤로그 일부)
20여년을 한국지엠에 몸담은 최종 전 총괄 부사장이 한국지엠과 한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들에게 ‘다음 10년을 위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산업은행 투자 협상, 정부와의 경영정상화 협의, 군산공장 폐쇄, 노사 교섭, 법인 분리 갈등 등 저자는 한국지엠의 중요한 역사적 변곡점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다.
1964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한 저자는 삼성그룹에서 13년간 국제변호사로 일하다 2002년 글로벌지엠의 대우자동차 인수를 계기로 지엠대우에 합류했다. 이후 21년 동안 법무, 대외정책, 노사관계 등을 두루 맡았고, 특히 2018년 한국지엠 경영정상화 과정에서 정부와 산업은행, 노동조합 사이에서 실무 협상을 총괄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그에게는 당시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세 권의 협상 노트가 있었고 언젠가는 글로 정리하리라 마음먹고 살아왔다. 이러한 자신의 기록을 바탕으로 앞으로 필요한 10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이제는 “담벼락 밖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위치에서 그 질문에 답하고 싶다”며.
하지만 한국지엠에서의 당시 결과물이 성공인지의 여부는 섣부르게 정의하지 않는다. 한 기업의 흥망성쇠는 늘 사이클이 있기에 어느 특정 지점을 논하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다만 차분하게 지난 2018년 한국지엠 문제를 기원으로 삼아 현재를 생각하고 미래에 대한 고민거리를 제시한다.
책 ‘GM은 왜 한국을 떠나지 않는가’는 ‘회생의 시간’(파트 1)과 ‘존속의 시간’(파트 2)으로 나뉘어 있다. 파트 1에서는 3조원에 육박하는 누적 적자와 반복되는 ‘지엠 철수설’ 속에서 파국을 막기 위해 벌였던 절박한 협상의 기록을 담는다. 파트 2에서는 일시적 회생을 넘어 전동화라는 거대한 산업 전환기를 맞아 한국지엠이 마주한 엄중한 현실을 냉철하게 짚는다.
2018년 합의했던 ‘10년의 약속’ 만료가 내후년으로 다가왔지만 전동화 전략 수정과 미래차 국내 생산 계획의 불확실성은 한국지엠의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저자는 지금 현재에 대해서 “이제는 종이 위의 약속이 아니라 그 약속 없이도 남아 있을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우선 던져야 할 질문은 ‘지엠이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가 아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지엠이 한국에 남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되도록 만드는 구조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이다. 남는 것이 떠나는 것보다 더 이익이 되고, 더 안정적이며, 더 예측 가능할 때 기업은 머문다. 지엠 역시 예외일 수 없다.”(책 ‘존속의 조건’ 일부)
2026-08-27
브로드웨이 역사상 ‘최고 사전 예약’ 흥행 작품
실제 순록 크기의 스벤·의상·무대장치 공들여
원작 음악보다 많은 새 넘버, 감정·서사 풍부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뮤지컬 무대가 한국에서 막을 올렸다. 2018년 초연 이후 브로드웨이 역사상 최고의 사전 예약 기록을 세우며 큰 호응을 얻은 겨울왕국은 이후 북미투어와 웨스트엔드, 일본, 호주, 독일 등 세계 주요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됐고, 어느 때보다 더웠던 올 여름 마법처럼 차갑고 얼음처럼 빛나는 무대로 한국 관객을 찾았다.
해외에서만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작품을 한국에서 만나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개막 전부터 높은 기대감을 자아냈다. 이미 애니메이션으로도 최고의 인기를 끌었지만, 무대와 의상, 특수효과 등의 연출과 음악, 배우들의 연기까지 한데 어우러진 뮤지컬로 만나는 겨울왕국의 매력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겨울왕국은 마법의 힘을 가진 엘사와 그의 동생 안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동안 숨겨왔던 힘이 드러나자 두려움에 즉위식에서 도망친 엘사와 그로 인해 혹독한 겨울이 찾아온 아렌델 왕국을 되찾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안나가 서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오디션 과정을 거친 것으로 알려진 배우들은 영화에서 보던 통통 튀는 매력을 가진 특유의 캐릭터와 그 표현들을 생각했던 것보다 한층 더 자연스럽게 녹여냈고, 의상부터 무대장치까지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얼음으로 이뤄진 궁전의 모습은 마치 구슬을 엮어놓은 듯한 섬세함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냈고, 엘사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약 1만개의 비즈를 수작업으로 꿰어내 조명 하나하나의 반짝임으로 표현됐다. 특히 엘사가 두꺼운 장갑과 갑갑한 드레스에 갇혀 있던 세계에서 점차 자신을 찾아가며 바지로 된 의상을 입기까지의 서사도 흥미롭게 볼만하다.
장면마다 화려하게 펼쳐지는 무대들과 우리 귀에 익숙한 음악들도 물론 좋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Let It Go’였다. 엘사가 제어되지 않는 자신의 힘이 두려워 왕국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자유로움을 찾는 장면으로, 그간 자신을 감싼 갑갑한 옷을 벗어던지고 아이스 드레스를 입은 자기 자신으로 마침내 변하는 모습이 마법처럼 펼쳐져 관객들의 환호성을 자아냈다. 엘사에게서 터져 나오는 파워풀함이 극대화되는 순간을 공연장에서 마주하는 것 자체가 관객들에겐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장면으로 남는다.
눈사람 ‘올라프’와 순록 ‘스벤’의 존재감 역시 눈길을 끌었다. 스벤은 실제 순록의 크기로 만들어져 배우의 연기로 정교함을 더했고, 배우가 드러나 있는 채로 직접 퍼펫을 연기하는 올라프는 실제 배우의 표정과 퍼펫이 주는 귀여움이 더해졌다. 차가웠던 겨울 세상이 뜨거운 여름의 계절로 바뀌는 순간 여름날의 눈사람을 기대하며 부르는 올라프의 넘버 ‘In Summer’는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했다.
극은 또한 애니메이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넘버들로 안나와 엘사의 감정과 서사를 채워준다. 원작의 음악 8곡에 새로운 12곡의 음악이 추가됐는데,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며 고뇌하는 엘사의 넘버 ‘Monster’와 안나와 엘사가 가진 서로에 대한 애틋함과 유대감을 표현한 ‘I Can’t Lose you’ 등 뮤지컬에서만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작품 속에서 견고함을 다졌다.
얼음으로 된 다채로운 마법의 세계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뮤지컬 겨울왕국은 샤롯데씨어터에서 내년 3월 1일까지 계속된다.
2026-08-26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 ┃최희선 지음. 퍼플 펴냄. 215쪽. 1만6천900원
38년 공직생활의 묵묵한 기록을 담은 최희선 작가의 신간 에세이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가 출간됐다.
이 책은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화려한 성공담이나 출세의 요령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1987년 스물두 살의 나이에 9급 공무원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 수많은 좌절과 승진 누락의 아픔, 가정과 일 사이에서의 번민, 그리고 코로나19 최전선에서의 헌신을 거쳐 복지국장(기술서기관)에 오르기까지 제자리를 지켜낸 한 공직자의 진솔한 생의 기록이 담겼다.
저자의 38년 공직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9급에서 8급으로 올라서기까지 9년, 7급에서 6급에 이르기까지 무려 14년이라는 뼈아픈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인사발령 방송에서 끝내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던 날, 아무도 없는 한강 자전거길을 달리며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켜야 했던 기억은 그가 통과해야 했던 시련의 깊이를 아프게 증명한다.
만삭의 몸으로 감행해야 했던 야간 단속과 보건소 한구석에서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다 잠들곤 했던 어린 딸의 모습은 행정 최일선에서 주민을 지키면서도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저자는 끝내 시련과 억울함을 원망으로 돌리지 않았다.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출근해 민원 창구와 보건·복지 현장을 묵묵히 지켰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는 감염병 대응의 최전선에 서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일궈냈다. 긴 세월 동안 그를 지탱한 힘은 화려한 승진의 속도가 아니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책임감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견딤’이었다.
공직생활의 마침표를 앞두고 찾아온 유방암 진단이라는 뜻밖의 시련 역시 저자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시련을 성찰로 승화시키며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인생 2막을 시작한 저자는 “늦게 도착했다고 해서 잘못 온 것은 아니며, 조금 늦게 피는 꽃이 있듯 조금 늦게 인정받는 사람도 있다”는 담담한 깨달음을 건넨다.
끊임없이 타인과의 비교와 속도 경쟁을 강요하는 현대사회에서,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는 조급한 마음의 정적을 깨며 독자 곁으로 깊숙이 다가간다. 승진과 평가의 압박에 지친 직장인, 홀로 뒤처진 것 같아 불안해하는 청년,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중장년 모두에게 이 책은 버텨온 지난날을 보듬어주는 나지막하지만 깊은 위로의 손길이 되어줄 것이다.
최희선 작가는 “이 책은 대단한 성공 비법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끝까지 걸어간 한 사람의 평범한 기록”이라며 “홀로 뒤처진 것 같아 조급해하거나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조금 늦었을 뿐, 당신의 계절과 시간도 반드시 찾아온다’는 작은 위로와 응원이 전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2026-08-24
구리시정신건강복지센터 지원사업
‘마음, 눈으로 보다Ⅱ’ 성황리 개최
구리 청년 20인의 따뜻한 연대기
2030 구리시민 20명이 용기를 내 내면의 아픔을 꺼내 놓았다.
구리시정신건강복지센터가 정신건강회복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마련한 ‘마음, 눈으로 보다Ⅱ’를 통해서다.
해당 전시는 ‘보이지 않는 무게’를 부제로 달고,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구리아트홀 갤러리에 전시됐다.
윤진웅 정신건강복지센터 센터장은 “이 전시회가 누구나 마음이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따뜻한 연대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된 작품 70여점은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공간마음이음에서 진행된 정신건강회복프로그램에 참여한 청년층 20명이 1년간 준비했다. 기간이 정해져 있기에 각각의 능력치에 따라 게시한 작품수가 다르다. 물론 자신의 어려움을 드러낼 마음의 준비 정도도 달랐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매체에 공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어떤 작가는 자신이 가진 이야기를 전부 꺼내놓기 어려워 했다. 작가의 이름을 모두 비공개한 것은 작가들의 자신감 부족이 아니라 잊혀질 권리를 누구보다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 무게를 먹는 사람
정모 씨는 포도가 꼭지쪽은 달고, 아래쪽은 보다 시다는 것을 깨닫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자신처럼 단발을 하고 아름답게 옷을 갖춰입은 소녀는 우아한 탁자에 놓인 포도의 아랫단을 먹어치우고 있다. 가족들에게 단 것을 먹이기 위함이다. 그러나 맛없는 쪽을 우걱우걱 먹던 소녀는 그 무게감에 족쇄가 채워지고 말았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정씨가 가족 걱정으로 우울증에 묶인 자신에 대한 연민을 고스란히 그림에 담았다.
정씨는 연작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6개의 연작은 어항을 뒤집어 쓰고 세상을 왜곡해 바라보던 데서 시작해 엄마를 위로하고 걱정하는 딸이 이젠 어린시절의 아픔을 의식의 바다 심연으로 밀어넣는 데까지 이어진다.
연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반지하 방이 배경이다. 캥거루 옷을 입은 정씨는 반지하 밖으로 나와 비를 맞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문이 닫혔다. 창문을 두드리려 했을 때 엄마는 씻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한 채 소파에 쓰러져 잠들었다. 정씨는 엄마가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란 바다에 시달리는 지친 섬. 이날 정 씨는 창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엄마의 곤한 잠을 지켜주기로. 고작 유치원생밖에 안되는 정씨는 다음 작품에서 캥거루 옷을 벗는다.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
김모 씨는 3편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그는 ‘아틀라스’ 작품설명에서 “주변의 기대와 시선이 부담스럽고 짊어지기기가 힘들다.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고, 살고 싶지 않다”고 했고, ‘창작의 고통’에서는 “가끔은 내 실력이 욕심만큼은 못 해서 창작하는 자체가 괴롭고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혐오스러워지고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고도 했다. 타인의 시선이 유달리 중요한 한국사회에서 이 얘기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김 씨는 마음을 ‘파도’로 표현했다. 그는 “이 폭풍은 언제쯤이면 잔잔해질까. 나는 언제까지 계속 헤엄쳐야 할까” 되묻는다.
■누구도 해칠수 없는 나
자존감 찾기는 모든 사람의 목표같다. 이모 씨는 타인의 시선을 물리치고, 타인의 놀림마저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는 어릴 적에 이름 때문에 ‘원숭이’라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현명한 어머니는 ‘재주많은’ 원숭이라며, 주변의 놀림을 긍정적으로 받았고, 그는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마저 가장 좋아하게 됐다고 했다. 자신의 얼굴을 원숭이와 묘하게 섞어낸 자화상의 색채가 아름답다.
사람의 몸이다. 아름답게 표현하지 않고, 성기 쪽에 벌레를 그리는 등 혐오를 표현한 건 이모 씨가 가까운 친족에게 자신의 성을 유린당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그 경험을 털어놓고 마주하고 있지만, 20년 이상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이 씨는 노란 심장을 강조했다. 그는 영화 ‘세계의 주인’ 속에 등장하는 피해자가 그 당시의 피해로 인해 ‘내 삶이 파괴됐다’고 한 부분을 언급하며, “파괴됐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 삶의 파괴를 인정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다시 살아갈 희망을 노란 심장에 담았다”고 말했다.
■회복이란
위모 씨의 작품에는 항상 꽃과 하늘이 있다. 특히 그의 그림 중 눈길을 끄는 건 나비다. 파란 하늘을 날아 꽃을 향하는 나비는, 그러나, 한쪽 날개만 있다. 위 씨는 자신의 그림을 이렇게 설명했다.
“회복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로 다시 날아가는 용기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2026-08-23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 오페라 명곡부터 신보 ‘컨티뉴엄’까지
조수미, 인천서 부른 프리마돈나의 인생
이탈리아 유학길 스무 살부터 인생 고백까지
“화장 지우면 쓸쓸했지만, 인생은 살아볼 가치”
‘아베 마리아’·‘라데츠키 행진곡’ 앙코르 환호
“1983년 스무살의 나이로 작은 가방을 들고 저는 이탈리아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했어요. 새벽 3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어요. 처음 도착한 그곳에서 언어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인터넷도 없었죠. 국제전화를 하려면 버스를 타고 1시간을 가야 했어요…”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우리 시대 최고의 성악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조수미가 지난 21일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인천시민과 만났습니다. 조수미는 이날 40여년 전 타국 땅을 밟던 그날에 대한 기억을 꺼내는 것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조수미는 3년의 시간을 배움에 몰두했습니다. 이탈리아어, 오페라 수업 등은 물론 음악에 관한 모든 궁금증들을 조수미는 하나하나 풀어 나갔습니다. 다른 이들이 5년을 쏟아부어야 통과하는 교육 과정을 조수미는 불과 3년 만에 끝냈습니다. 그리고 1986년 조수미는 드디어 이탈리아 주세페 베르디 극장에서 오페라 ‘리골레토’의 프리마돈나로 데뷔를 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어느덧 40년이 흘렀습니다. 맞습니다. 이날 공연은 조수미 세계무대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인천시가 마련한 무대였습니다.
이날 조수미는 중간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2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프리마돈나 인생 40년 이야기를 음악과 솔직담백한 이야기로 풀어냈습니다.
조수미는 1부를 ‘그리운 이름이여’ ‘울게 하소서’ ‘꿈 속에 살고 싶어라’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아베 마리아’ 등 귀에 익숙한 오페라 명곡으로 구성한 ‘오페라 메들리’로 시작했습니다. 이어 우리 가곡 ‘아름다워라’(김진환 작곡, 오은비 작사), ‘로망스’(박종훈 작곡, 대니구·정근엽 작사), 라인홀드 글리에르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위한 협주곡 Op.82’ 1악장 안단테, ‘부온조르노(Buongiorno)’(박종훈 작곡·작사), ‘가면’(최진 작곡·작사) 등을 연주했습니다.
2부에서는 번스타인의 오페라 ‘캔디드’ 중 ‘난 어디서나 쉽게 적응한다네’, ‘시간의 선물’(고영환·류영민 등 작곡, 하정호, 고일환 작사), 지아조토의 ‘아다지오 g단조’, 영원한 평화(무라마츠 타카츠구 작곡, 박수진 작사) 등을 들려줬습니다. 지난 5월 발표한 데뷔 40주년 기념앨범 ‘컨티뉴엄(continum)’ 수록곡을 위주로 선보였습니다. 연주는 최영선이 지휘하는 밀레니엄오케스트라가 맡았습니다. 곡이 끝날 때 마다 객석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조수미는 프리마돈나로서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 일본, 독일, 미국, 우리나라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습니다. 지금도 1년 중 2~3달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해외에 머문다고 합니다. 화려한 프리마돈나의 삶 뒤에 숨겨진 외로움에 대한 고백도 이날 엿들을 수 있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와 화장을 지우고 나면 몹시 쓸쓸해요. 그럴 때마다 우리 한국에 있는 가족을 생각했어요. 또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 그리운 추억을 떠올렸어요. 어려움과 외로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어요.”
공연 마지막을 장식한 앙코르 곡은 카치니(Giulio Caccini)의 ‘아베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라데츠키 행진곡’이었는데, 음악에 맞춰 조수미와 관객이 함께 박수를 치며 공연은 마무리됐습니다.
이날 조수미는 40주년 기념 공연에 대한 소회를 직접 밝혔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 소프라노가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노래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저의 40년 여정을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인천이 더욱더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하기 위하여 마음을 모읍시다.”
2026-08-22
‘버려지는 옷의 이야기를 손으로 만지시오’
330개 케어라벨 ‘연결의 단서’ 조각보 연상
아시아 생산 다수… 노동자의 모습 떠올려
‘패스트 패션’ 쇼핑 연상돼 묘한 기시감
인천 중구 신포동 ‘임시공간’서 전시
인천 중구 신포동 ‘임시공간’에서 전시 중인 배수림 작가의 개인전 ‘케어라벨’은 무겁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입고 버리는 ‘옷’과 그 쓰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어렵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작가는 아이 옷 안쪽에 붙은 케어 라벨을 떼어낸 경험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자신과 가족의 옷에서 떼어낸 330개의 케어 라벨을 실로 이어 만든 작품 ‘연결의 단서’는 얼핏 조각보를 연상시킨다.
지난 19일 오후 찾은 전시장에는 ‘만지시오. 손으로 감상해주세요’라는 문구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관람객은 색실로 이어진 케어 라벨을 손으로 더듬으며, 옷이 만들어진 국가와 재질, 브랜드 등 다양한 정보를 직접 읽어볼 수 있다.
작가는 330개의 케어 라벨을 국가별로 분류해 기록했다. 중국 111개, 베트남 87개, 한국 57개, 방글라데시 19개 등 대부분이 아시아에서 생산된 옷들이다.
배수림 작가는 “의류는 공정을 많이 거치지만 필수적으로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산업”이라며 “내 옷을 만들어줬을 얼굴 모를 사람들, 특히 아시아 국가 노동자들을 떠올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라별로 수를 세어봤다”고 설명했다.
행거에 걸린 어린이 옷에는 각국의 언어로 메시지가 적혀 있다. ‘그저 싸고 예쁘면 되었으니’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까요’ 같은 문장은 천 위에 실로 새겨져 시선을 붙든다.
모든 티셔츠는 뒤집힌 채 전시돼 솔기와 케어 라벨이 붙어 있던 안쪽이 그대로 드러난다. 옷의 ‘안쪽’을 드러내며 그 이면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게 한다.
배수림 작가는 “티셔츠는 캔버스이자 스크린,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매체”라며 “케어 라벨이 붙어 있던 면을 드러내 안쪽의 껄끄러움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행거에 걸린 메시지를 읽기 위해 옷을 들춰보다 보면 기시감이 든다. 옷이 빽빽하게 걸린 ‘패스트 패션’ 브랜드 매장에서 옷을 고르던 과거의 기억과 겹쳐진다.
이 전시가 ‘무겁지 않다’는 것은 메시지가 얕다는 의미가 아니다. 환경과 소비, 노동 문제를 다루면서도 미적으로 아름다운 형식을 통해 관람객이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는 의미다.
전시장 한편에는 작업 과정도 함께 전시돼 있다. 작가는 매일 다섯 개의 케어 라벨을 이어 붙이며 떠올린 생각과 기록을 캔버스에 정리해 놓았다.
전시가 진행 중인 건물 외관은 실제 옷가게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전시장을 찾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아기 옷을 사기 위해 들어왔다가 전시임을 알고 당황한 주민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평소 전시장에 들어오지 않을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유입되길 바랐다”는 작가의 의도다.
작가는 옷에 대한 고민을 앞으로도 케어 라벨 작업으로 이어갈 계획이다. 배수림 작가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계속 옷이 바뀌는 만큼 라벨도 계속 쌓인다”며 “이 작업이 평생 이어지면 하나의 삶의 기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이 작업을 위해 옷을 더 사기보다는, 옷을 오래 입고 소중히 들여다보는 마음을 담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는 26일까지 이어진다.
2026-08-21
김정희 대표, 퇴사 후 서점… ‘어느덧 7년’
문학·예술·그림책 등 다채로운 큐레이션
지속적인 운영 숙제… 오래 사랑받길 꿈꿔
‘서성이지 말고 문열고 들어와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책방에 이렇게 들어가는 게 맞을까 서성이고 있던 기자의 눈에 들어온 포스터 문구였다. 묘하게 용기를 주는 글에 얼른 중간 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이 가득 퍼지고 있는 책방 입구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아늑한 공간과 책들이 반갑게 자리했다.
시흥시 조남동에 자리한 ‘책방내심’의 김정희 대표는 IT 회사의 마케터로 일하다 쉼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퇴사를 하게 됐다. 그러다 우연히 여행지에서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됐는데, 그곳에는 ‘서점 없는 동네는 동네도 아니지’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좋아하는 책들을 보물처럼 모아둔 지역의 작은 책방을 열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흥에 생긴 첫 큐레이션 책방은 어느덧 7년이란 시간이 쌓였다.
지역의 책방들은 분명 어떠한 형태로든 저마다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김 대표 역시 엄청난 일을 하겠다는 거창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책방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시작했고, 이러한 곳이 생기길 기다려왔던 지역 사람들을 자연스레 맞이하게 됐다.
문화 기획자, 인형 디자이너, 작가, 가수 등 분야도 다양했다. 이들과 함께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책방을 찾는 지역 주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김 대표에겐 큰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이는 곧 그가 만들어 가고자 했던 책방의 모습과도 궤를 같이했다.
김 대표는 “책을 파는 공간이지만 책 너머의 어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문화 예술을 즐기며, 취향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것이 지향점이었다”며 “이 모든 것을 아울러 ‘책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하고 즐기는 공간’을 그리며 책방을 운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책방을 채운 책들은 문학, 인물, 예술, 그림책 비중이 높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회의 다양성이나 돌봄과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 있으면 그 방향으로 조정하기도 하고, 책이 주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필요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담아낸 이야기들 등 직관적으로 책을 선정하기도 한다.
김 대표는 “책방을 운영한 건 정말 후회하지 않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더 즐겁게 일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조건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책방이 좀 더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길 바랐다.
“사람들이 습관처럼 편안하게 즐겨주시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거기에 지역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더욱 좋을 것 같아요.”
[책방내심이 추천하는 책]
‘겸사겸사’ 건넨 마음
관계 잇는 작은 도움
■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오가와 사야카 지음. 갈라파고스 펴냄. 296쪽
책의 저자이자 문화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는 탄자니아를 드나들며 그들의 경제활동과 삶의 방식을 관찰하고 이해해왔다. 그런 그가 자칭 타칭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를 만나게 되면서 홍콩의 청킹맨션에 살고 있는 탄자니아인들의 커뮤니티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현대사회를 돌아보면 손익을 계산하는 인간관계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들은 “내가 너를 도우면 언젠가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거야”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겸사겸사’라는 키워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떠한 기대 없이 겸사겸사 다른 사람을 돕는 것. 느슨하게 연결돼 보이지만 묘하게 계속 작동하는 커뮤니티의 모습 속 공존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2026-08-20